작성날자 : 2017-09-19    조회 : 204
 
양사언과 《비래정》전설

양사언(1517-1584)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시인, 명필이다. 자는 응빙이고 호는 봉래, 완구, 창해, 해객이다. 돈녕주부 양희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열중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모르는것이 없어 비범한 인재라 하였다고 한다. 154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후 자진하여 지방관으로 나가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윤, 회양부사 등을 지냈다. 회양부사로 있을 때 자주 가마를 타고 금강산에 들어가 자연을 즐기니 마치도 신선이 된듯 했다고 한다. 1582년에는 65살의 나이로 안변부사를 지냈는데 이 벼슬 역시 그가 스스로 지망한것이라고 한다. 그는 안변부사로 있을 때 북방전란을 예견하여 큰 못을 파고 마초를 많이 저장하였다고 하여 통정대부의 벼슬을 받았으나 그로부터 얼마 안되여 지릉(리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의 릉)에 화재가 일어난 책임을 지고 황해도쪽으로 귀양갔다. 2년후에 류배지에서 풀려 돌아오던중에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16세기 국문시가창작의 대표적시인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시조 《산이 높다 하되…》를 들수 있다. 양사언은 회양부사로 있을 때에 《금강산유람기》를 썼다고 한다. 그는 시뿐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리용, 김정희, 한호와 더불어 조선봉건왕조시기 4대명필로 이름이 났다. 안변부사로 있을 때 10여일씩이나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절승경계에 도취되여 만폭동입구의 바위에 《봉래풍악 원화동천》이라는 글자를 새겼으며 묘향산을 유람할 때에도 룡연폭포에 이르러 그 장엄한 경치에 격동되여 《신선굴택 운하동천》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이 글들은 지금까지 전해지며 힘있고 웅건한 필치로 하여 후세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고있다. 문집으로 《봉래시집》(3권1책)이 있다.

 

《비래정》전설

1564년에 양사언(봉래)는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마음껏 시도 읊고 글씨도 남기려고 그가 늘 마음속에 그리던 금강산에 찾아왔다.

그는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구선봉 아래의 풍치수려한 감호가까이에 집한채를 세웠다. 양봉래는 이 집에 《비래정》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비래정》이란 《날아온 정자》라는 뜻이다. 그는 여기에 어지러운 세상살이에서 벗어나 신선처럼 살려고한 자기의 심정을 담았던것이다.

양봉래는 《비래정》에서 맑은 물 출렁이는 감호와 하늘높이 솟은 구선봉이며 가없이 펼쳐진 동해바다가의 아름다운 경치를 내다보면서 떠오르는 시상을 모아 시를 읊고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면서 지냈다. 그는 여기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감호는 거울속에 있는 부용(련꽃)같고 구선봉은 하늘가에 소라(바다조개의 한가지)처럼 틀어올린 상투머리 같다고 하면서 감호와 구선봉은 자기집 두리에 친 병풍이라고 즐겨 말하였다.

어느 화창한 날이였다. 양봉래는 이날 새로 지은 집에다 《비래정》이라는 편액(방안이나 문우에 거는 액틀)을 써서 달고싶은 충동을 누를길 없었다. 그는 문장과 서예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던만큼 지금껏 련마해온 재능을 깡그리 쏟아부어 편액을 잘 써보리라 마음먹고 온 정력을 기울여 활달하면서도 기운찬 필치로 《날비》자를 먼저 큼직하게 써놓았다. 써놓고 보니 글자의 한획한획이 방금 하늘로 날아오를듯 서리여 꿈틀거리는 룡의 기상이 완연하여 자기딴에도 대견하고 만족스러웠다.

양봉래는 《비》자에 이어서 《래》와 《정》자를 썼다. 그런데 그 글자들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정성이 모자라는것만 같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두 글자를 썼으나 여전히 《날비》자만 못하였다. 그는 안타까운 심정을 지그시 누르고 몇번이고 고쳐 썼으나 종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양봉래는 그만 화가 치밀어올라 붓을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먼저 써놓은 《날비》자를 새겨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 글자만은 살아움직이는듯 하여 마음에 꼭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날비》자만으로 족자를 만들어가지고 자기 서재에 걸어놓았다.

세월은 흘러 양봉래는 안변부사로 가게 되여 임지로 떠나게 되였다. 그는 《비래정》을 떠나면서 사람을 두어 집을 지키게 하였다.

1582년이였다. 그는 릉묘에 불이 붙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낯설은 땅에서 귀양살이를 한지도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지나간 1584년의 어느날이였다. 그가 한때 신선처럼 살리라 꿈꾸며 지어놓았던 《비래정》에 고성지방의 특이한 드센 바람이 갑자기 불어닥쳤다. 서재문을 벌컥 열어제친 바람은 방안에 두었던 책이며 병풍이며 족자들을 사정없이 휩쓸어 안고나가 공중으로 흩날려버렸다.

집을 지키던 사람은 황급히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다 주어모았다. 그런데 다른것은 잃어진것이 없었으나 《날비》자를 쓴 족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양봉래가 그토록 애지중지한 족자가 없어진것을 알고서는 부리나케 바람부는 방향을 따라 바다가까지 뛰여가며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종적이 묘연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양봉래와 가깝게 지내던 한 친구가 족자가 잃어진 날자와 시간을 따져보니 그가 세상을 떠나던 그 시각과 일치하였다고 한다. 그는 양봉래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봉래(양사언의 호)의 과거를 생각할적마다 어느사이에 슬픔이 북받침을 느낀다. 봉래가 비록 이 세상 풍진속에 있었으나 실은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였다. 그의 깨끗하고도 비범한 글씨와 시문은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고있었는데 귀양지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아까운 일이로다.》

언제인가 《비래정》을 찾았던 한 진사가 《날비》자가 하도 마음에 들어 모사하여두었는데 그는 임진왜란속에서도 그 글자만은 불에 태우지 않고 보관하여두었었다. 양봉래의 맏아들인 양이근이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가 모사한 《날비》자를 보면서 파란많은 아버지의 한생을 추억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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