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날자 : 2018-10-13    조회 : 167
 
금강산과 력사인물들(6) 정수동

정지윤(1808-1858)은 조선봉건왕조 말엽에 풍자와 해학으로 이름난 사람이다. 중인신분의 한 역관집에서 태여난 그의 자는 경안이고 호는 수동이였다. 항간에서는 이름보다도 보통 정수동으로 통하였다.

정수동은 뛰여난 시인으로서 평민출신의 작가들인 조수삼, 천수경 등과 가까이 사귀였으며 시집 《하원시초》가 전해지고있다.

일찌기 부친을 여읜 그는 어려서는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자라났고 커서는 또 부인의 바느질품으로 집안살림을 지탱해나갔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의 부인은 조금도 이를 괴로워 하지 않고 지성껏 남편을 받들었다. 그는 남편의 심정을 잘 알아주었고 남편이 당대의 명사들과 사귀면서 문학에 명성을 날리고있는것을 큰 자랑으로 삼고있었다.

그러나 나라정사가 부패할대로 부패해진 시절에 산 정수동은 지체가 낮은 중인신분인탓으로 하여 남다른 포부와 재능을 펴볼수 없는 우울한 심사를 시와 술, 해학과 풍자로 풀며 평생을 민간에 파묻혀 지냈다.

그는 권세에 아부할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옳지 않은 일, 어리석은 일, 비렬한 일을 보고는 조금도 참지 못하는것이 그의 타고난 천성이였다. 그의 신랄하고 통쾌한 풍자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딩굴지 않고는 못배기게 하는 해학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것이다.

한때 어느 대감이 그의 재간을 아끼여 벼슬길을 터놓았지만 정수동은 그 연줄을 타고 부귀공명을 탐내기보다는 이미 살던대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마음껏 량반세상을 비웃기도 하고 명산대천을 찾아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속에 묻히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택하였다. 그래선지 일년 삼백예순닷새치고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태반이였다.

정수동의 금강산구경과 관련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유명하다.

그의 안해가 방금 해산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정수동은 순산을 시키자면 불수산(약이름)을 지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부리나케 옷을 주어 입고 집을 나섰다.

단골약방을 찾아 걸음을 다그치던 그는 길거리에서 마주 오는 친구 두사람과 딱 마주쳤다.

《아니, 두분이 동무해서 어디를 이렇게 가시나?》

정수동이 반가운김에 인사겸 묻자 《마침 잘 만났네. 그러지 않아도 우리 둘이 함께 오면서 자네 이야길 하던 참이야.》하고 친구들도 반색을 하였다.

《내 얘기를?! 그런데 대체 어디를 가시게?》

정수동이 궁금해서 다시 묻자 《글쎄, 내 말 좀 들어보게. 어제 저녁 이 친구의 집에서 글짓기를 하던 차에 금강산경치이야기가 튕겨나오질 않았겠나. 갑자기 금강산구경생각이 간절해지는데…

그래서 내친김에 아예 오늘 금강산으로 떠나기로 작정하고 이렇게 가는 길일세.》친구들은 이렇게 말하며 벌써 금강산에 다 오른듯이 흥에 들떠 벌씬벌씬 웃는것이였다.

《오라, 그래서 두분이 내 얘길 하셨군그래.》

정수동은 감심한듯 머리를 끄덕이며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바로 맞혔네. 그래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려나?》

《그야 물어 보나마나지.》

친구들이 묻는 말에 평소에 금강산유람이 소원이던 정수동은 두말없이 응낙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수동은 자기가 지금 안해의 약을 지으러 간다는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친구들이 이끄는대로 서울장안을 빠져 나와 금강산으로 향했다.

단발령을 넘어 금강산경내에 첫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정수동일행은 넋을 빼앗는 절경에 취하여 소문난 명소들에서 보름 혹은 열흘씩 묵으며 도도한 시흥과 주흥으로 시간 가는줄 몰랐다.

기기묘묘하고 청신함과 우아함이 이를데 없는 금강산의 모든 경치좋은 곳들을 차례차례 빠짐없이 찾으면서 그들일행이 유점사에 이른 날이였다. 그곳 대웅전에서 부처들을 차례로 돌아보던 정수동의 입에서는 《아차!》하는 소리가 튀여 나왔다.

부처들의 넙적한 손을 보는 순간 갑자기 자기가 불수산을 구하러 떠난 일이 생각난것이였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그 이야기를 하며 금강산이 떠나갈듯 한바탕 웃고나서는 또다시 봄이 가고 가을이 올 때까지 1년세월이 뒤바뀌여가는것도 감감 잊고 금강산유람을 하였다.

그렇게 구경한 다음에야 세사람은 건들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정수동이 친구들과 헤여져 자기 집대문으로 들어서니 방안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법석이고 있었다.

다름아니라 이날인즉은 정수동이 불수산을 지으러 집을 나간뒤에 부인이 다행히도 순산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금강산을 구경하느라고 돌아다니는 사이에 어느덧 1년이 지나 그때 태여난 아들애의 첫돌이 잡히는 날이였다.

그런줄은 꿈에도 모르고 정수동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방안에 있던 부인이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띠우고 분주히 마루로 나와 맞으며 《령감님이 원체 성미가 급하시여 아이돌이 잡히는 날에야 불수산을 지어 가지고 들어오십니다그려.》하고 한마디 하였다.

부인의 말에 정수동은 빙그레 웃으며 응수하였다.

《내 성미는 본래 그렇듯이 급하려니와 미처 불수산이 오기도전에 아이 돌잔치부터 차리려 드는 부인의 성미도 과히 유하지는 않은것 같소.》

곁에서 그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듣고있던 일가친척들은 모두 배를 부여잡고 웃으며 한동안 허리들을 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심부름을 갔다가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돌아오는 경우를 두고 《정수동의 불수산》이라고 말하였으며 이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월의 흐름조차 잊게 하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있다.

정수동은 《정승대감의 시》,《통빨래》,《대감의 망건》,《닭 타고 가지》를 비롯한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일화들을 많이 남겼으며 그런것으로하여 그는 시인으로보다도 오히려 봉이 김선달, 김삿갓과 함께 풍자가, 해학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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